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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의 의학사 (韓國醫學史)
이름: 관리자 * http://hidream.or.kr

등록일: 2005-08-01 12:17 / 조회수: 18733 / 추천수: 554
한국의 의학사(韓國醫學史)

고대국가 시기에서 현재까지 이어져온 우리나라 의학의 역사.

고대국가시대

고조선시대에는 독자적인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고, 노예소유제적 봉건통치를 실시했다. 이 시기의 법령인 범금8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생명과 건강을 매우 중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국가의 질병관은 천벌이나 몸 안에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이 들린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질병이 발생한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므로 '역신'을 물리칠 수 있는 무당 같은 존재에 의존했다. 그러나 돌침요법과 뜸요법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돌침은 외과적 요법에도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약물요법으로는 산삼·마늘·쑥·대추·밤 등 여러 가지 식물성 약재와 가물치·닭 등 동물성 약재를 사용했다. 고대국가의 위생관념은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흰옷을 좋아하고 청결했으며, 해충을 제거하고 몸을 가꾸는 위생적 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우리 선조들은 BC 1세기경 고구려·백제·신라라는 강력한 봉건국가를 세웠다. 삼국시대의 기본생산은 농업이었으나 어업·염업·상업 등이 상당히 발전했고,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또한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이 발전해서 건강과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심화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고대국가시대부터 발달해온 보건의료제도를 이어받은 삼국은 이를 더욱 현실적이고 과학적으로 발전시켰다. 고구려에 '시의'(侍醫)라는 관직이 있었다는 기록이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전해지며, 이로 미루어보아 국가기구 내에 보건의료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 '약부'(藥部)라는 전문보건의료기구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니혼쇼키〉에는 백제에 의박사와 채약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의약이 분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는 태의승과 약장승이라는 의료직제가 있었으나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채약사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백제의 의약분업이 독자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신라에는 '약전'이라는 의료기관이 있었고 의료직제로 내공봉의사·국의·곡봉복사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또한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자선적인 구료사업을 했고, 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여러 활동을 했으며, 위생적인 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고대국가시대에 비해 의학과 약물요법이 크게 발달해 중국과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통일신라시대

7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는 격변기를 맞이했다. 당나라의 성립과 그에 따른 대외 팽창 정책은 삼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외세에 힘입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며 옛 고구려 땅에서는 뒷날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대진국)가 건국되었다.

발해는 많은 제도를 고구려에서 취했으므로 의학분야도 고구려와 유사할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라는 676년 당나라와의 전쟁 이후 200여 년 간 외세 침입이 없었기 때문에 농업·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고, 그에 따라 보건의료제도가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구조상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의 건강보다는 지배계급의 건강을 중심으로 한 의료제도가 바탕을 이루었다. 삼국의 우수한 문화를 흡수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발전했던 보건의료제도를 참작하여 보다 정비된 보건의료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당나라의 여러 직제를 수용했다. 대표적인 의료기관으로는 약전(藥典)이 있었는데 이는 한때 보명사(保命司)라고 불렸고, 의약기술자 이외에 행정업무를 보는 직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약무만이 아니라 보건의료사업 전반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약전 이외에 의료사업을 담당한 의사들의 관명으로는 국의·공봉의사·내공봉의사·의관·의박사 등이 있었다. 특히 의박사는 의사를 양성하는 의학기관의 교수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국가적 정규 의사양성사업의 첫 기록이 692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신라의 의사양성사업은 그당시의 당나라나 일본과 다른 독자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중국·일본과 달리 침의사와 의사를 구별하지 않은 것, 교재의 차이(〈난경〉과 〈침경〉의 사용), 기초이론적인 교재의 사용 등에서 독자성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보건의료제도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상당히 형식적이기는 했지만 자선의료사업을 들 수 있는데, 상설기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방별로 자선에 필요한 물품을 비치해둔 것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질병관과 임상의학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이는 고대의 신비적·미신적 질병관에서 외부의 힘이 작용하는 외인론이 대두된 점과 당시 창궐하던 전염병을 여러 병으로 분류하여 처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임상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이전보다 더 많은 약물들이 치료에 쓰이기 시작했다. 이는 곧 본초학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이미 〈본초경〉 등 본초서가 수입되었고, 중국·일본으로 신라의 여러 약재가 수출되고 있었다. 특히 인삼·우황은 국제간의 증품으로 〈삼국사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불교의 번성으로 승의들이 많은 활약을 했지만, 주술적인 형태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로 보건의료상 오류를 남기기도 했다.

고려시대

10세기에 들어서면서 발해는 거란에 의해 무너지고, 극도로 타락한 신라는 후백제·후고구려와 30여 년 간의 전쟁을 거쳐 고려로 통일되었다. 통일 후 많은 침략전쟁을 치러야 했던 고려는 군인들과 민중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건의료사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컸고, 생산력 향상과 과학발전으로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특히 12세기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해서 출판업이 발전했고 그에 따른 의학서적들의 간행과 보급이 크게 늘었으며, 항해기술이 발전함으로써 해외무역으로 인한 의료서적과 약재의 수출입이 활발해졌다. 또한 질병에 대한 인식 및 그에 대한 치료 능력이 크게 발전했고, 전염병에 대한 방역대책과 더욱 자세한 분류방법을 강구했다.

전기(918~1018)
고려는 창업초부터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어진 정치를 표방했으며, 그에 따라 보건의료기관을 정비·강화하여 모든 군현에 의사를 배치했다. 이는 수·당의 의학에 영향을 받은 신라의학전통을 어느 정도 계승한 것이다. 또한 국력강화를 위해 인구증가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지배층의 건강증진을 위해 보건의료사업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중앙 보건의료기관으로 중앙의 지배계급의 건강 증진과 질병치료를 담당한 전의사(사의서·태의감 등으로 명칭이 변경된 시기가 있음)와 왕궁 내의 어용 보건의료기관인 봉의사(1357년 상의국, 1363년 봉어서, 1372년 봉의서 등으로 명칭이 변경)·사선서(국왕의 식사 담당 기관)·다방(차·보약 등을 끓여 제공하는 기관)·약장랑(왕세자의 건강과 보육을 책임지는 직제)·한림의관(왕과 귀족의 질병을 치료하는 직제) 등이 있었다. 그리고 서민들을 위해 혜민국(惠民局)·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제위보(濟危寶) 등을 설치하여 자선의료활동을 했다. 지방의료기관으로는 행정단위인 주·부·현에 약점(藥店)을 설치했다. 신라의 구제도에 따른 의학교육제도를 실시하면서 과거법을 새로 제정하여 의사를 육성·선발했는데, 의약교육의 질을 높이는 한 방편으로 평민들도 의과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했다.

중기(1018~1259)
이 시기는 고려의 중흥기로 중국의 신흥국가인 송나라와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의학교류가 장려되어 의학서적·약물·의료인의 교류가 여러 형태로 진행되었다. 또한 인쇄술의 발달로 인도의 의학서적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기 후반에는 여러 지식들이 융합되어 고려 자체의 경험방들이 편집되고, 향약에 대한 경험방도 간행되었다.

고려가 거란을 물리친 후 국력이 세계적으로 위력을 떨쳤고 그에 따라 대외교류가 활발해졌다. 고려 정부는 품질이 우수한 약재생산과 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당시의 고려는 막강한 국력으로 여진·송·일본은 물론 멀리 남방의 제국가와 아랍의 여러 나라와도 직접 약재 교류를 했다. 특히 송나라와는 약재의 교류뿐만 아니라 서적과 인적 자원의 교환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주요약품으로는 고려에서 송나라로 인삼·향유·송자(松子)를 수출했으며 송나라로부터 각종 향료, 서각, 용뇌(龍腦) 등을 수입했다. 이러한 의학적인 교류는 고려의 의학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랍인들은 7~8세기에 걸쳐 눈부신 해상활동을 통해 인도·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푸젠[福建]을 지나 일본과 고려까지 교역을 했으며 고려에는 수은·용치(龍齒)·점성향·몰약·대소목(大蘇木) 등 많은 의약품을 가져왔다. 이들은 대부분 열대성 의약품이었는데 이러한 희귀한 약물들을 접하게 되면서 아라비아 의약의 지식도 상당히 축적되었다. 고려는 또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일본 등과도 직접 교역했는데 이러한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향약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향약재에 대한 긍지를 갖게 되었다.

신라의학의 전통을 이은 고려의학이 인도의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중기초인 1010년 초조대장경판(初雕大藏經板)을 조각할 때 인도의 의학서들을 채록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실제로 초조대장경판은 유실되어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1236년경에 조각한 재조대장경판에서 10여 종의 의학서들이 관찰됨으로써 초조대장경판에도 채록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에서는 인도의학에 대한 신념이 깊었고, 당시의 명승들 중 의술에 정통한 승의들이 인도의술을 보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후반 향약(우리 고유의 의약)이라는 용어가 기록에 나타난다. 고려의 통치자들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는 천시하고 중국에서 수입한 당재만을 중히 여겼다. 그래서 왕이 병이 들면 비싼 당재를 사들이고 중국의 의료인을 초빙했다. 그러나 가난한 민중들은 산지에서 직접 약초를 채취하여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해외와의 의약품 교역과 그 실제적인 사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산천에서 나는 의약재가 우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향약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12세기에 접어들면서 향약에 대한 좋은 책들이 서술되기 시작했다. 특히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은 그 처방이 자세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으며, 이름 그대로 급한 시기에 의사를 청할 수 없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에 걸쳐 계속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조선시대인 1417년(태종 17)에 간행된 것이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1부만이 보관되어 있다. 1226년 최종준이 편찬·간행한 〈어의촬요방〉에는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지식에 의한 임상적 관찰의 결과가 잘 나타나 있다. 그외에도 중국·인도 등의 외국서적을 간행하거나 이러한 서적들을 참작하여 편술한 책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후기(1260~1392)
몽골 제국인 원나라와 오랜 전란을 마친 후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여 왕래가 잦아지면서 남방열대산 약재 수입이 더욱 왕성해졌다. 중기 후반부터 연구되어오던 향약의 전문방서들을 더욱 발전시켜 고려의학의 자주적 기초를 더욱 굳게 했다. 고려는 원나라와 모든 문물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의학교류에 있어서는 왕비가 병들었을 경우 원나라 의사를 초청했으며, 원나라에서도 제왕이 고려의 의원을 초청해가곤 했다. 이처럼 100여 년 간 원나라와 20여 회에 걸쳐 의약품을 상호 교역했으며, 중요한 의약품이 오갔다. 고려에서는 인삼·향다(香茶)·수과(水果)·송자·탐라소유(耽羅蘇油)·오매(烏梅) 등을 보냈으며 원나라에서는 포도주·앵무·공작·황향 등을 보내왔다. 당시 몽골 제국의 판도는 중앙 아시아에서 유럽 일부에 걸쳐 있었으므로 원나라 관리 중에는 많은 서역인들이 있었고, 그에 따라 많은 서구의학적 요소와 접할 수 있었다. 중기 후반부터 싹트기 시작한 향약에 대한 연구와 믿음은 많은 의학 관련서적을 편찬·간행하게 만들었으며, 후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지고 전문성을 띠게 되었다. 정도전은 1389년 맥법을 쉽게 해설한 〈진맥도결 診脈圖訣〉을 편찬했다. 그밖에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향약고방 鄕藥古方〉·〈동인경험방 東人經驗方〉·〈향약혜민경험방 鄕藥惠民經驗方〉·〈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 등이 있으며, 이들은 실전되었으나 조선시대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에 처방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14세기말 고려 봉건정부의 국방중추를 담당하고 있던 신흥군벌 세력인 이성계 일파는 세기말적 정치혼란이 심해지고 사회·경제가 악화된 시기에 왕조를 일으켰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적인 생산수단의 발전이나 소유관계의 변화가 없는 왕조의 변화였기 때문에 고려의 여러 상황과 제도를 답습했다. 고려시대부터 큰 발전을 이룩한 인쇄술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발전을 거듭했으며, 유교를 표방한 정치이념에서 많은 책들이 인쇄·보급되었고, 〈농사직설〉·〈금양잡록〉 등 농업과학기술 서적의 보급도 늘어나 조선시대 경제의 토대가 되는 농업의 증대가 일어났으며, 그와 함께 수공업의 발전으로 국내외 상업의 발전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하에 역학(曆學)·지리학·의학 등 자연기술과학이 여러 방면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출판·인쇄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기술과학 서적들이 보편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전기(1392~1592)
조선이 건국하면서 민중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과학기술과 문화의 발전, 특히 한글창제에 따른 의약서적 편찬사업의 확대·보급, 보건의료체제의 강화 등 사회적 요인이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의료제도에 있어서 조선은 고려의 의료제도를 계승하면서 필요에 따라 새로운 기관을 설치했다. 중앙 의료기관으로는 내약방(內藥房)·전의감(全醫監)·혜민국(惠民局)·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 또는 동서대비원)·제생원(濟生院)·종약색(種藥色)·의학(醫學) 등이 있었고, 지방 의료기관으로는 의원(醫院)·의학교수원(醫學敎授院)·의학교유(醫學敎諭)·의학원(醫學院)·의학승(醫學丞) 등이 있었다. 내약방은 왕실에서 상용되는 내약 전담기관으로 세종 때 내의원(內醫院)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관직은 도제조·제조·부제조·첨정·판관·주부·직장·봉사 등이 있었다. 전의감은 국내 의료행정을 총괄하는 중앙관서로 의학교육 및 과거의 직무까지 겸했으며, 관직은 판사·감·소감·승·겸승·주부·겸주부·직장·박사·검약·조교 등으로 구분되었다. 혜민국은 고려 때의 기구를 답습한 것으로 일반민중들의 질환을 구치하는 기관이었고, 동서활인원은 도내의 환자들 중 무의탁 환자와 전염병 환자를 주로 취급했다. 제생원은 혜민국과 함께 일반민중을 위한 구료기관으로 의녀(醫女) 양성과 함께 각 지방의 향약재의 수납과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 등의 편집과 같은 중요한 의료사업을 했다. 종약색은 약초를 재배하는 곳으로 설립된 후 곧 전의감에 통합되었다. 의학은 병(兵)·율(律)·자(字)·역(譯)·산학(算學) 등과 더불어 6학의 하나로 설치된 의학교육기관이었으며 중앙 의료기관인 전의감·제생원·혜민서 등에는 각각 의생방을 설치하여 의사를 양성했다. 이는 의료기관에 의사양성소를 병설한 조선 특유의 제도였다. 지방에서는 의원·의학교수관·의학교유에서 의사를 양성했다. 조선에서는 고려에 비해 의사과거를 비롯한 시험제도를 한층 완비했다. 잡과에 속한 것으로 녹시(의사로서 국가의 녹봉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시험)와 의과시(고급관리가 되기 위한 시험)가 있었으며, 그밖에 검정시험과 유사한 시험과 침구사 시험이 따로 있었다.

후기
200여 년 동안 안정기였던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일본과 명나라에 의해 서양의학과 문물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명나라의 도움을 받은 조정은 사대주의가 심화되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신흥 강국인 청나라와 2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민생이 피폐해졌다. 이로 인한 정치적인 부패는 더욱 심해졌고 의약기술의 발전도 침체에 빠졌으며, 19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열강들의 문화적 침투가 시작되었다.

1593~1800년의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과 2번에 걸친 호란을 겪으면서 안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통치계급의 부정부패, 권력쟁탈을 위한 당쟁, 극심한 친명사대주의 등으로 인해 사회전반에 걸쳐 심각한 침체기다. 이러한 사회전반적인 보수성향과 사대주의는 우리 전통의학에 억압을 가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의학서적이나 의료인들에게 많은 핍박이 가해졌다. 또한 조선초 장려되어 어느 정도 활기를 띠던 향약의 수탈이 강화되면서 약초밭은 황폐화되기 시작했고, 약재의 전반적인 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와 더불어 인구증가 및 질병치료를 위해 더욱 많은 약재가 필요했으므로 약령시라고 하는 약재시장을 만들어 약재의 유통과 생산을 원활하게 하고자 했다. 의학에 대한 사고가 지배계급에서는 사대주의 경향을 띠면서 다소 추상적인 형태였던 반면, 실제로 의료 일선에서 활약하던 의사들은 보다 자주적이고 임상적인 면을 강조한 의료기술을 습득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의약활동을 한 명의 허준에 의해 1621년 〈동의보감 東醫寶鑑〉 25권 25책으로 편성되었다. 이는 매 편이 모두 전문 의학책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저술로서 중국·일본 등 동양의 여러 나라 의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의보감〉은 내경편·외형편·잡병편·탕액편·침구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근세 임상의학의 각 과를 망라한 한방의학의 백과사전으로서 청나라와 일본에서 출판되어 현재까지도 한의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동의보감〉의 전통을 이어 18세기 전반에 많은 의학저서가 편찬되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조선은 왕자 2명을 포함하여 많은 신하들이 인질로 잡혀갔고, 그들은 청나라에서 많은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서양 문물 중에는 천주교리의 내용을 담은 서적이 많았는데, 그러한 서적 중에는 의학에 관한 내용이 함께 수록된 서적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서양 문물과 그 영향을 받은 중국의 변화된 문화는 조선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실학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상은 의학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에 따라 이익의 〈성호사설 星湖僿說〉에서는 서양의학의 생리학 분야와 혈액·호흡·신경계 등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이헌길의 〈마진방 麻疹方〉이나 정약용의 〈마과회통 麻科會通〉(1798) 등 전염병에 대한 책이나, 자신들의 임상경험을 살린 경험방서들의 서적들이 간행·출판되었다. 특히 〈마과회통〉에는 천연두 치료를 위한 E. 제너의 종두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적들은 대부분 당시 집권세력이 아닌 남인들에 의해 연구·발전되었으므로 불행히도 사회전반에 폭넓게 수용되지는 못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18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자본주의는 더욱 성장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적 관계와 낡은 봉건적 관계의 모순이 한층 심화되었다. 한편 구미 열강의 침략활동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감행되었다. 이러한 세계 정세에서 국가부강을 위해 낡은 제도를 청산하고 생산력을 강화하는 새로운 질서와 사상이 필요하다는 개화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개화사상은 자본주의 발전이 미숙했던 당시에 중간 계층이며 어느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고 있던 중인과 선구적인 양반층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은 당시 중인이 대부분이었던 의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근대 초기의 한방의학은 〈동의보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황도연의 〈부방편람 附方便覽〉(14권)·〈의종손익 醫宗損益〉(12권)·〈의방활투 醫方活套〉(1권), 황필수의 〈방약합편 方藥合編〉(1권) 등은 동의보감 중 실용에 긴요한 처방들을 실제 의료에 맞게 편집한 것이다. 또한 사상의설(四象醫說)을 주창한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3권)과 부양론(扶養論)을 강조한 이석고의 〈의감중마 醫鑑重磨〉 등이 있다.

서양의학의 본격적인 전래는 1876년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성립되면서 일본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서울·부산 등 각 개항지에 서양의학에 의한 병원을 개설하고 의료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다. 1877년 부산 제생의원(齋生醫院)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개설한 서양식 의료기관이다. 그후 계속해서 원산에 생생의원(生生醫院), 1883년 인천 일본영사관에 일본병원, 같은 해 서울 일본공사관에 일본관의원 등을 설치했다. 이러한 일본의 서양식 의료기관은 물론 자신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것이었지만 우리나라 의료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일찍이 정약용의 〈마과회통〉에서 소개된 종두법은 우리나라의 일부지역에서 시행되다가 서학과 천주교의 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9세기말인 1880년대에 들어와서 박영선·지석영 등에 의해 실시되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 이후 보건의료문제에 대해 형식적으로나마 변화를 시도하여 갑신정변 당시 많은 활약을 했던 앨런을 중심으로 1885년 왕립병원인 광혜원(廣惠院 : 2주일 뒤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했다. 이 병원은 개원 당시부터 미국선교회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후로도 조선 정부의 재정상태 악화로 더욱 미국선교회에 의존했다. 미국선교회는 전국각지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많은 의료활동을 했다. 1884년 개혁자들의 갑신정변 실패와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 및 통치권 내부의 부패와 무능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외세의 힘에 의존하려던 조선 정부는 결국 조선침략에 대한 빌미를 주게 되었다. 이에 혁신관료들은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했고, 그에 따라 보건의료제도도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들 혁신관료들은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군국기무처를 창설했고, 이 기구에 의해 의료사업은 내무아문에 소속된 위생국이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의과시 제도가 폐지되고 의사 임명 및 등용이 새로운 관리임용법에 따라 진행되었다. 또한 약재의 생산·판매 등에서도 구법이 폐기되었다. 1897년 근대식 병원인 내무병원을 설립하고 다음해에 광제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 일반구료사업과 죄수치료·전염병치료 시설을 갖추었으며, 1906년부터 창녀들의 검사를 실시했다. 1907년 의정부직할 대한의원이 설립되어 광제원의 역할을 계승·담당하고 교육부·위생부를 증설했다.

의학교육제도로는 1899년 학부직할로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다. 이것은 1907년 대한의원이 설립되면서 대한의원교육부로 개칭되었다가 1910년 대한의원 부속의학교가 되면서 의학교 내에 의학과와 약학과를 두었으며, 산파 및 간호과도 병설했다. 그밖에 대구·평양 등에 의학강습소가 있었으며, 사립의학교로는 제중원의 제중원의학교가 1904년 미국의 도움으로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의학교로 이름을 고치고 1908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1909년 사립 세브란스 병원의학교로 정부인가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1910년 일제의 한일합병에 따라 이 땅에는 군국 식민주의가 실시되었다. 이 시기의 의료행정은 조선총독부의 경무총감부 내에 위생과를 설치하여 담당하게 했다.

의료행정은 크게 보건과 방역으로 분류되었으며, 서의학을 시행하는 의사와 종래의 한의학을 배운 의생(醫生)으로 구분하는 이원적 방법을 취했다. 또한 의사는 의사·한지의사(限地醫師) 또는 치과의사·입치영업자(入齒營業者)로 구분했다. 한지의사와 입치영업자는 당시 부족한 의료인들을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자격을 인정했다. 그밖에 산파·간호부·안마술사·침구술사 등의 면허도 별도로 시행했다. 약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약제사·약종상·제약사·제약업자·매약업자 등으로 구분했다. 행정상 필요한 의료인을 위해 공의·촉탁의를 두었는데, 공의는 주로 전염병 예방, 지방병 조사, 종두 실시, 공공위생, 예기·창기·작부들의 건강진단, 사체검안 등의 공무의료를 취급했고 촉탁의는 경찰임무를 위해 공무상 상해·질병진단, 행려병자의 처리 등을 취급했다. 방역은 전염병 예방에 관한 것으로 예방령에 규정된 콜레라·적리(赤痢)·장티푸스·파라티푸스·두창·발진티푸스·성홍열·디프테리아·페스트 등 9종 전염병과 폐디스토마·나병 등 지방병, 마진·폐결핵 등의 예방규정도 반포되었다.

의학교육제도는 대한의원 부속의학교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로 되었다가 1916년 4년제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4년제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압적으로 아사히[朝日] 의학전문학교로 그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1932년 수업연한이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설립했는데, 일본인 중심으로 우리나라 학생은 1/4 정도였다. 1922년 경성치과의학교가 설치되었다가 1929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8·15 해방 후 현재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했다. 미군정시기를 거쳐 1948년 남한지역에 단독으로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의료제도가 점차 현실에 맞도록 정비되었다. 의학교육의 연한은 종전대로 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통일되었으나 국가시험 및 수련과정인 인턴·레지던트·전문의 자격시험 및 일반의료행정의 모든 제도들이 미국전통을 많이 답습했다.

미군정 초기에는 중앙에 위생국, 그후에는 보건후생국을 두었지만 1946년 보건후생부로 독립하여 의무국·예방의학국·위생국·수의국·약무국·구호국·후생국·부인국 등 13국을 배치했고 지방에도 보건후생국을 두어 의료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사회부 안에 보건국을 따로 설치했다가 그 다음해인 1949년에 사회부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뒤 보건부는 사회부와 이합(離合)을 계속하다가 1955년 보건사회부(보사부)로 독립되었으며, 보사부는 1994년 보건복지부로 개편되었다. 현재 보건복지부는 보건 관계로 보건국·식품국·의정국·약정국을 두고 보건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국립의료원·보건원·보건안전연구소·정신병원·소록도병원·재활원·결핵병원·검역소 등이 설치되어 보건 및 방역 사업을 연구·관리하고 있다. 지방에는 시립병원·공의·보건소 등을 통해 의료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 협력하고 있으며 국제아동기금 등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경성대학교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설립했고, 세브란스 의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대구·광주 의학전문학교도 6년제 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정부수립 후에는 많은 의과대학을 신설했고 그 소속병원들의 개편을 시행했다. 1990년 현재 의과대학 23개교와 한의과대학 5개교가 설치되어 있어 의학교육은 서의학과 한의학 2원제로 실시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경희대학교·부산대학교·단국대학교에는 6년제 치과대학이 설립되었고, 서울대·연세대·경희대에서는 보건대학원을 병설하여 공중보건의 전문석사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학은 각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기초의학에 있어서 많은 발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임상의학에 있어서도 외과학·방사선의학·정신과의학·첨단의학 분야 등은 발전을 거듭해 국제의학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특히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지 12년 만인 1989년 전국의료보험이 실시되고 1990년 의료전달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의료형태가 보다 전문적으로 안정되어가는 추세에 있다. 또한 예방의학·환경위생·공중보건학 등 각 분과별 연구에 각 대학의 예방의학 분과와 보건대학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산울림

진심으로 감사 합니다.
2009-07-30
19: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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